긴자에 처음 발을 디딘 날, 나는 루이비통 쇼핑백을 들고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건물 외벽만 올려다보며 걸었다. 쇼핑 거리로 유명한 이 동네가 사실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 건축물이 가장 밀집된 야외 갤러리라는 걸 그때서야 실감했다. 렌조 피아노, 아오키 준, 이토 토요, 구마 겐고 — 건축학과 교과서에서나 보던 이름들이 불과 몇백 미터 안에 다 모여 있다. 쇼핑이 목적이 아니어도, 아니 쇼핑에 전혀 관심이 없어도, 긴자는 충분히 반나절을 쏟을 이유가 있는 동네다.
이 투어는 어떤 사람에게 맞나요?
건축이나 디자인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추천하지만, 그냥 “긴자 어떻게 돌아보지?”를 고민 중인 분께도 이 루트가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각 건물은 무료로 외관 감상이 가능하고, 상당수는 내부 갤러리도 무료 개방한다.
교통편: 도쿄 메트로 긴자선·마루노우치선·히비야선 긴자역 하차. 투어의 기점이 되는 긴자 메종 에르메스는 긴자역 A13 출구에서 도보 1분 거리다.
소요 시간: 외관 위주 빠른 투어 2~3시간 / 내부 갤러리 포함 반나절(4~5시간) / 가부키 단막 관람 포함 하루
1. 긴자의 등불 — 긴자 메종 에르메스
긴자에서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건물이었다. 렌조 피아노가 설계하고 2001년에 문을 연 긴자 메종 에르메스는 멀리서 보면 그냥 유리 건물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서면 전혀 다른 건물이 된다. 외벽 전체를 감싼 13,000개의 유리 블록이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거나 내뿜으면서, 시간대마다 다른 표정을 만들어낸다.
렌조 피아노가 이 건물을 설계할 때 참고한 건 일본 전통 행등(行燈), 즉 거리를 밝히던 손잡이 달린 등이었다. 밤에 긴자 메종 에르메스 앞에 서면 그 의도가 바로 이해된다. 내부 조명이 유리 블록을 타고 밖으로 번지는 모습이 거대한 등불 같다. 낮에는 채광을 위한 소재이고, 밤에는 도시를 환히 밝히는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유리 블록은 미적 선택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지진이 잦다. 강철 프레임에 실리콘 접합부로 연결된 각 유리 블록은 지진 발생 시 최대 4mm까지 유동성을 확보해 충격을 흡수한다. 건물 전체가 커튼처럼 출렁이도록 설계한 것이다. 아름다움과 안전성을 동시에 해결한 방식이 렌조 피아노답다.
관람 팁: 낮보다 해 질 무렵부터 야간이 훨씬 인상적이다. 내부 조명이 켜지는 저녁 6시 이후 15분쯤 건물 맞은편 인도에서 바라보는 에르메스는 진짜 거대한 등불처럼 빛난다. 건물 내부 2~3층에는 르 포럼(Le Forum)이라는 무료 갤러리가 있으니 외관 감상 후 들어가 보자.
2. 도쿄 베이를 담은 외벽 — 루이비통 마쓰야 긴자
에르메스에서 긴자 중앙 거리 쪽으로 조금 걸으면 루이비통 마쓰야 긴자점이 나온다. 건축가 아오키 준의 손을 거쳤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2025년 대규모 리뉴얼을 거쳐 파사드가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 건물 외벽을 감쌌던 패턴 대신, 지금은 도쿄 베이(도쿄만)의 수면에서 빛이 반사되는 모습에서 착안한 물결 형태의 외벽이 건물 전체를 두르고 있다.
소재는 다이크로익(dichroic) 필름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특수 필름으로, 정면에서 보면 은빛이지만 비껴서 바라보면 금색이나 청록색으로 바뀐다. 낮 햇살 아래서는 물결이 반짝이는 것 같고, 흐린 날에는 차분하게 가라앉는 색감이 된다. 같은 건물인데 날씨나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인상을 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내부 인테리어는 아오키 준과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피터 마리노(Peter Marino)가 협업했다. 외관의 물결 테마가 내부 공간에도 그대로 이어져, 카운터와 전시대의 곡선 처리에서도 같은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최상층에는 도쿄 최초의 르 카페 V(Le Café V)가 들어서 있어, 건축 투어 중간에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3. 전통 공예가 건물이 되다 — 도큐 플라자 긴자
에도 기리코(江戸切子)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온 도쿄 전통 유리 세공 기술이다. 유리 표면에 정밀한 기하학 패턴을 손으로 커팅해서 넣는 공예로, 빛을 받으면 무수한 반사면이 입체적으로 빛나는 게 특징이다. 도큐 플라자 긴자는 이 에도 기리코를 현대 건축 파사드로 번역해낸 건물이다.
설계는 닛켄 셋케이(日建設計)가 맡았다. 일본 최대 건축설계회사 중 하나로, 나카모토 타로를 중심으로 한 팀이 2016년에 이 건물을 완성했다. 외벽의 대형 유리 패널들이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되어 마치 거대한 유리 커팅 작품처럼 보인다. 정오 무렵 햇살이 강할 때 파사드에서 튀어나오는 빛 반사는 사진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 눈부심이 있다.
건물 꼭대기인 6층에 있는 기리코 테라스(KIRIKO TERRACE)는 무료로 올라갈 수 있는 옥상 공간이다. 긴자 메인 스트리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꽤 좋고, 테라스에도 에도 기리코 패턴이 그대로 반영된 난간과 구조물이 있어 디테일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맑은 날 오전, 사람이 많지 않을 때 올라가보길 권한다.
4. 구멍 뚫린 핑크 건물의 정체 — 미키모토 긴자 2
긴자를 처음 걷는 사람들이 종종 “저 핑크 건물 뭐야?”라고 묻는 건물이 있다. 진주 브랜드 미키모토의 플래그십 스토어인 미키모토 긴자 2다. 건축가는 이토 토요. 2013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센다이 미디어테크와 타이중 국립오페라하우스로 유명한 그가 2005년에 설계했다.
이 건물의 핵심은 외벽에 불규칙하게 뚫려 있는 창문들이다. 직사각형이 아니라 모서리가 둥근 아메바 형태의 창이 각기 다른 크기로 배치되어 있다. 일정한 패턴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토 토요는 이 창문들을 내부 공간의 구조와 빛의 흐름을 계산해서 배치했다. 핑크 계열의 외벽 색상은 미키모토의 진주, 그리고 봄 벚꽃을 연상시킨다는 해석도 있다.
바로 옆에는 이토 토요가 같은 시기에 설계한 토드(TOD’S) 긴자 빌딩도 있다. 나무 가지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가 외벽 전체에 드러나 있는 건물인데, 두 건물을 나란히 보면 이토 토요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건축을 탐구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5. 긴자 최대 랜드마크, 그 안에 담긴 것 — 긴자 식스
2017년 개장한 긴자 식스(GINZA SIX)는 지상 13층, 지하 6층, 약 240개 브랜드가 입점한 긴자 최대 규모의 상업시설이다. 외관 설계는 다니구치 요시오가 맡았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확장 설계로 잘 알려진 그답게, 건물 파사드는 극도로 절제된 수평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다니구치 요시오는 이 건물을 설계할 때 “건축은 내용물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외관이 단순한 이유가 거기 있다. 그 대신 내부로 들어서면 천장 높이 솟은 중앙 보이드 공간에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야노베 켄지 등 일본 현대미술 작가들의 대형 설치 작품들이 걸려 있어 시선을 빼앗는다.
공용 인테리어는 프랑스 디자이너 그웨나엘 니콜라(Gwenaël Nicolas)가 담당했다. 긴자와 교토의 골목을 모티브로 통로를 살짝 굽게 설계해서, 직선 통로였다면 단조로웠을 쇼핑 동선을 “걸으면서 새로운 걸 발견하는” 경험으로 바꿔놓았다.
무료로 즐기기: 옥상 긴자 식스 가든은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영업시간 내내 개방하며, 날씨 좋은 날 긴자 도심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꽤 쾌적하다. 별도 예약 없이 엘리베이터로 바로 올라가면 된다.
6. 400년 전통과 29층 타워가 공존하는 곳 — 가부키자
긴자 건축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가장 극적인 장소는 역시 가부키자(歌舞伎座)다. 일본 전통 공연예술 가부키의 성지이자,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건축적 사건이다. 지금의 건물은 2013년 완공된 제5기 가부키자로, 전통 목조극장의 외관을 충실하게 복원하면서 그 뒤에 지상 29층짜리 가부키자 타워를 세워 올린 구조다.
이 이중 구조의 설계에 구마 겐고가 참여했다. 앞에서 보면 에도·메이지 시대의 모모야마(桃山) 양식으로 지은 전통 극장이고, 뒤에서 보면 유리와 강철로 된 현대 오피스 타워다. 정면에서 사진을 찍으면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 사진이 나오고, 옆 골목에서 바라보면 전통 지붕 위에 고층 빌딩이 솟아오른 충돌의 미학이 담긴 사진이 나온다. 두 장 다 찍어두는 걸 추천한다.
가부키 공연을 볼 계획이 없더라도 내부를 경험할 방법이 있다. 히토마쿠미(一幕見) 제도를 이용하면 공연의 단막(1막)만 따로 구매해 관람할 수 있고, 지하에는 공연을 보지 않아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기념품 거리 기와카(木挽町広場)가 있다. 가부키 관련 과자, 도자기, 부채 등 소품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7. 잠깐, 고전도 보고 가자 — 긴자 와코
현대 건축만 이야기했지만, 긴자 4초메 교차로 코너에 서 있는 긴자 와코(銀座和光)는 1932년에 지어진 건물로 긴자 거리 전체의 기준점 같은 존재다. 신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외관과 정상부의 시계탑은 오랫동안 “긴자의 얼굴”로 불려 왔다.
주변의 유리와 금속으로 가득한 현대 건축들 사이에서 오히려 이 건물이 튀어 보인다. 90년이 넘은 건물이 긴자의 한가운데서 가장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건물 외관에 조명 장식이 더해져 레트로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추천 투어 코스 3가지
반나절 코스 (약 2~3시간)
긴자역 A13 출구 → 긴자 메종 에르메스(외관 + 르 포럼 갤러리, 30분) → 루이비통 마쓰야 긴자(외관, 10분) → 미키모토 긴자 2 / TOD’S 긴자(외관 비교, 15분) → 도큐 플라자 긴자(기리코 테라스 포함, 30분) → 긴자 와코(외관, 10분) → 긴자 식스(내부 아트 + 옥상 가든, 40분)
야간 집중 코스 (약 2시간)
오후 6시 이후 출발. 긴자 메종 에르메스(야간 등불 감상, 필수) → 루이비통 마쓰야 긴자(다이크로익 필름 야간 반사) → 긴자 식스(저녁 조명 내부 + 야경 옥상). 밤에는 각 건물 파사드가 낮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므로, 사진 찍기에도 훨씬 드라마틱하다.
하루 코스 (약 5~6시간)
반나절 코스 전체 + 가부키자(외관 사진 + 지하 기와카 광장) + 히토마쿠미 관람(당일 공연 일정 확인 필요). 가부키자는 하긴자역(東銀座駅) 바로 앞에 있어 긴자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긴자 건축 투어 실용 정보
- 주말 보행자 천국: 봄~가을 일요일 및 공휴일 오전 11시~오후 5시, 긴자 중앙 거리(긴자 주오도리)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된다. 건물 전경을 방해물 없이 가장 넓게 담을 수 있는 시간이다.
- 무료 전망 공간: 도큐 플라자 긴자 기리코 테라스(6층), 긴자 식스 가든(옥상) 모두 별도 요금 없이 개방한다.
- 무료 갤러리: 긴자 메종 에르메스 르 포럼(2~3층), 긴자 식스 내 설치 미술 모두 쇼핑 없이도 입장 가능.
- 사진 촬영: 각 건물 외관과 공용 공간 촬영은 자유롭다. 매장 내부는 브랜드별로 정책이 다르므로 직원에게 확인하는 편이 낫다.
- 혼잡 시간대: 주말 낮 12~3시가 가장 사람이 많다. 건물 앞에서 방해받지 않고 사진을 찍고 싶다면 평일 오전이나 개장 직후를 노리자.
긴자 건축 여행을 더 즐겁게 만드는 추천 숙소









